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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듣는다

굿멘 2007. 5. 23. 14:41
김수현 기자의 문화가 산책

온 몸으로 듣는다 - 맨발의 이블린 글레니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봄이 한껏 무르익었습니다. 행복한 봄날 만끽하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온몸으로 소리를 느끼는' 맨발의 타악 연주자 이블린 글레니 얘깁니다. 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정상의 타악기 연주자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어제 이블린 글레니를 인터뷰하고 돌아와서 쓴 글을 보내드립니다.

제 블로그(http://ublog.sbs.co.kr/shkim0423)에도 올린 글입니다.

이블린 글레니는, 아름다웠습니다.

 

인터뷰할 때, 참 하기 어렵고 민망스러운 질문들이 가끔 있다. 질문 받는 사람이 싫어할 줄 알면서도 해야 하는 질문들. 어제 타악기 연주자 이블린 글레니를 인터뷰할 때도 그랬다.

이블린 글레니는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다. 8살 때 청력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해 12살 무렵에는 청각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으니, 음악가가 되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셈이지만, 이블린 글레니는 귀로 듣는 대신 온 몸으로 소리의 진동과 파장을 감지하며천재적인 리듬감을 자랑하는 타악기 연주자가 됐다.

이블린 글레니는 무대 위에 맨발로 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리를 온 몸으로 듣는다는 그는, 소리를 좀 더 잘 느끼기 위해 맨발을 고집한다. 이블린 글레니의 맨발은, 어떤 식으로든 악기와 직접적 신체 접촉을 하게 되는 현악기, 관악기와는 달리, 채를 사용해 간접적으로 접촉하는 타악기를 좀 더 친밀하게 '몸으로' 느끼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이블린 글레니는 오케스트라에서 부수적인 악기로만 여겨지던 타악기를 어엿한 독주 악기의 반열에 올려놓은 연주자다.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을 위해 쓰인 새로운 작품들(그에게 헌정된 곡이 140여 곡에 이른다)을 연주하며  타악기 연주의 가능성을 넓혀왔다.

바흐와 비발디 등 바로크 음악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비브라폰과 마림바, 드럼 같은 서양의 타악기에서 한국의 장구나 징, 꽹과리 등 동양의 타악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악기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타악기 연주의 역사를 계속해서 새로 쓰고 있는 셈이다.

이블린 글레니의 내한공연(23일)을 주최하는 성남아트센터는 어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월간잡지를 위해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 씨와 이블린 글레니의 만남을 주선했다. 각기 신체적 장애가 있는 두 연주자를 한 자리에 모아놓는 셈인데, 성남아트센터측에서는 혹시나 관심이 있으면 함께 인터뷰해도 좋다고 의사를 전해왔다.

전제덕 씨가 혹시나 이블린 글레니의 공연에서 함께 연주하는 순서가 있나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나로서는 어쩐지 두 사람을 함께 인터뷰하는 것이 조금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들었고, 함께 연주하지도 않아 화면이 받쳐주지도 않는 상황이라 두 사람을 함께 인터뷰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아침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이블린 글레니와 전제덕 씨가 다른 매체와 인터뷰하고 있는 걸 잠시 지켜보게 됐다. 그 중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은 전제덕 씨가 단호한 어조로 "장애가 있는데 어떻게 음악을 연주하느냐, 이런 것은 이제 좀 그만 물어보라고 해 주세요. 이블린 글레니도 들을 수 있게 통역해 주세요' 하는 말이었다. 통역으로 전제덕 씨의 말을 전해들은 글레니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 글레니는 상대방의 입술을 읽어 대화한다.)

안 그래도,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이미 오래 전에 성공을 이뤄낸 예술가에게, 그의 예술세계에 집중하지 않고 새삼스레 지금 장애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어쩌면 아주 '비본질적'인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오던 차였기 때문에, 전제덕 씨와 이블린 글레니의 이 말을 듣고는 내가 할 인터뷰가 걱정됐다. 이블린 글레니는 아마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런 질문이 지겨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애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많은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바로 그 점을 궁금해 할 테니까. 내가 인터뷰할 차례가 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청각 장애가 있는데 어떻게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있었을까 궁금해 할 것 같다'고 했더니, 이블린 글레니는 아까 전제덕 씨보다 더욱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람들은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은 볼 수 없고,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을 들을 수 없고, 휠체어를 탄 사람은 걸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을요. 휠체어를 탄 사람도 걸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열 걸음, 혹은 스무 걸음까지도! 저는 몸으로 '듣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듣고, 촉각으로 듣고, 온 몸으로 듣습니다. (I hear! I hear through my body. I hear through my ears, eyes, touch, body.) 죽거나 마비된 경우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의 장애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장애예요. 왜냐면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에 한계를 긋는 행위니까요."

이블린 글레니는 청각 장애를 극복했다는 점을 제외하고, 그가 이뤄낸 음악적 성취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받아 마땅한 연주자다. 청각 장애라는 한계를 뛰어넘은 것처럼, 타악기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영역을 탐험해온 개척자다. 이블린 글레니는 많은 타악기 연주자들에게 그들의 앞날을 제시하는 '역할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역할 모델이 없었어요. 왜냐면 이전에는 저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공연을 열 때마다 한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왔어요. 저는 그런 걸 좋아해요. 안주하지 않고, 항상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고 싶어하죠."

이블린 글레니를 인터뷰하고 쓴 내 기사는, 원래 어젯밤 8시 뉴스에 나갈 예정이었으나 기사가 넘쳐 나가지는 못했고 오늘 아침 뉴스에 나갔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블린 글레니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기에 약간은 아쉽다.

이블린 글레니는 오늘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피아니스트 필립 스미스와 함께 스티브 라이히, 케이코 아베 등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고 (대부분이 이블린 글레니를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다),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자신의 편곡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의 이블린 글레니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음악에서나 개인적 삶에 있어서나 한계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도전해온 이블린 글레니. 그의 열정적인 연주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동을 느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