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열 정

굿멘 2007. 6. 11. 11:46
산도르 마라이 저/김인순 역 | 솔 | 2001년 07월
 

 사람은 서서히 늙어가네. 처음에는 인생과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기쁨이 늙어가지. 이보게, 정말로 차츰 그렇게 된다네. 모든 것의 의미를 알게 되지. 세상 만사 답답할 정도로 지루하게 되풀이 되거든. 그것도 나이와 관계있겠지. 유리잔은 그저 유리잔이라는 것을 아네. 그리고 인간, 이 가련한 존재도 무엇을 하든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에 지나지 않아.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눈이나 다리, 심장이 늙네. 단계적으로 늙어간다네. 그리고는 별안간 영혼이 늙기 시작하지. 육신은 늙었을 지 몰라도, 영혼은 동경과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세. 영혼은 여전히 동경하고, 기뻐하고, 또 기쁨을 희구하지. 기쁨에 대한 동경마저 사라지면, 추억이나 허영심만이 남네. 그런 다음 정말로 영영 늙는다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지. 그런데 무엇 때문에 깨어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게야. 하루가 어떠할 지 너무 잘 알지. 봄 아니면 겨울이고, 삶의 자질구레한 일들, 날씨, 하루의 일과,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 예기치 못한 일, 특별하거나 끔찍한 일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네. 인생의 모든 화복을 알고, 모든 것을 예상할 수 있고, 좋든 나쁘든 더 이상 알고 싶은 게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노년이라네. 마음 깊이에는 추억이나 뭔가 삶의 목표 같은 게 아직 살아 있지. 누군가를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든가, 말하거나 알고 싶은 것이 있네. 그리고 그 순간이 올 거라는 것도 정확하게 알지. 그러나 진실을 알고 진실에 대답하는 것도 몇 십 년 기다리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갑자기 시들해지네. 여러 가지 현상들과 인간을 움직이는 동인을 이해하지. 무의식의 상징이랄 까......인간은 생각을 상징으로 전달하기 때문일세, 자네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나?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마치 중국어 같은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아. 그래서 이 언어를 실제 현실의 언어로 옮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드러낸다네. 인간의 거짓말을 인식하여, 사람들이 생각하고 실제로 원하는 것과는 항상 다르게 말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주의하기 시작하면, 삶이 자못 흥미로워지지......그렇게 언젠가는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그러면 나이가 들어 죽음은 코 앞에 두었다는 뜻이네. 그러나 그것도 더 이상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아.

<산도르 마라이 '열정' 251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