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등골 서늘한 공포로 더위를 잊게 해주겠다는 친절한 영화계의 제안이 넘쳐나는 여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달 들어 여름 시즌 개봉을 앞둔 국내외 공포영화들의 시사회가 시작됐습니다. 공포영화를 돈 내고 본적이 한 번도 없는데다 작정하고 간 공포영화 시사회도 괴롭기 그지없어 공포영화 시사회가 있는 날에는 공과 사 구분에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다른 일반 영화 시사회때 선보이는 공포영화 예고편도 싫습니다. 각설하고 이번 주에도 다양한 영화들이 많이 개봉되는데 문제는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우리 주변의 멀티플렉스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해도 볼 수 없는 영화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션스 13

배우 몸값이 천문학적인 할리우드에서 이런 배우들 한자리에 모았다는 사실부터가 경이롭습니다. 게다가 영화적 재미까지 적절하게 갖췄으니 더할 나위 없죠. 오션스11에서 시작해 숫자가 하나씩 늘면서 3편째인데 사실 전편인 오션스12는 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비교적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무대도 다시 라스베가스입니다.
오션스 일당이 다시 라스베가스에 모이는데 일당의 최고 연장자인 루벤(엘리엇 굴드)이 동업하던 뱅크(알 파치노)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몸져 눕자 그 복수를 위해서입니다. 과거에 오션스 일당이 탈탈 털었던 카지노 업자 베네딕트(앤디 가르시아)까지 끌어들여 치밀한 복수 계획을 세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뱅크가 야심차게 새로 개장하는 호텔 카지노에서 개장 첫날 어마어마한 대박을 터뜨려 파산하게 하고, 호텔협회로부터 다이아몬드 5개 등급 받는 것을 방해하고, 뱅크가 호텔 꼭대기 층에 철통같은 보안속에 숨겨놓은 가장 아끼는 보석을 턴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홀딱 벗겨먹겠다는 의도인데 이에 대비한 뱅크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 작전 성공 여부는 미지수입니다.
시리즈 영화로서 완결편이라는 공언아래 작심하고 만든 티가 많이 납니다. 이야기 구성과 전개를 그럴 듯하게, 유머를 적절하게 섞어가며 경쾌하고 깔끔하면서 밉지 않은 사기극을 그려내는데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소더버그 감독과 조지 클루니의 친분에 의해 모인 스타들이 선보이는 힘빼고 설렁설렁하는 연기의 조화가 보는 사람도 가볍게 만들면서 개운한 뒷맛을 주는데 있습니다. 할리우드 인사 가운데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고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시리아나]같은 영화도 만들어내는 조지 클루니의 입장이 이 영화에서는 멕시코 플라스틱 공장의 파업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납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가 주고 받는 대사도 위트 넘치고 오프라 쇼 시청같은 에피소드도 훌륭한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나름 치밀한 변장으로 미남계를 쓰는 맷 데이먼도 귀엽고 각각의 배우들의 장점과 개성을 과하지 않게 적절하게 드러내는 것은 치밀한 각본과 훌륭한 연출 솜씨 덕분입니다. 또 한가지 한국 관객들이 눈길을 더욱 끌 것같은 장면은 삼성의 명품 휴대폰이 깜짝 출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그냥 배경이나 소품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식 PPL로 말입니다. 여기에다 대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흐뭇하긴 합니다.
스틸라이프

중국 6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중국 정부가 5세대를 탄압할 때처럼 아주 껄끄럽게 여기지만 세계적인 명성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는 지아장커 감독은 이 영화로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대상에 해당하는 황금사자상을 받았습니다. 영화주간지 평점에서 이렇게 많은 평론가들이 별 다섯 개 만점을 준 영화는 처음 봤습니다.
옛날에는 예술적이거나 조금 어려운 영화를 접하면 관객들이 이것 저것 찾아 뒤지면서 알아보고 도대체 뭔지 이해라도 해보자 하는 노력을 했었는데 요즘 관객들은 그냥 ‘쳇!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하고 무시한다는 영화계 인사의 푸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 영화는 전국에서 딱 한군데 스크린, 시네큐브 광화문에서만 개봉합니다.
영화의 무대는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댐인 산샤댐으로 수몰을 앞둔 지역입니다. 한 남자가 수십년 만에 아내와 딸을 찾아 이곳에 도착하는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인민폐를 미국 달러화로 둔갑시키는 공연에 억지로 끌려가 관람료를 뜯기고 이윽고 어디든 다 데려다준다는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는데 목적지는 이미 물에 잠겼고 아내 소식은 알 수 없습니다. 탄광에서 오래 일했던 이 남자는 결국 그곳에서도 철거현장 막노동으로 생계를 연명하며 아내를 찾는 노력을 계속합니다.
다른 한 여자는 남편을 찾아 왔습니다. 가동을 멈춘 공장을 찾아가니 남편은 다른 곳으로 갔고 남편이 쓰던 사물함에는 자신이 선물했던 차가 몇 년째 그대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남편은 중국에 밀려드는 자본의 물결 윗부분에 올라타 그럴듯한 지위에 돈도 많이 버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과의 만남을 계속 피하는 것 같고 이 여자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음을 여자의 직감으로 눈치챕니다.
수천년 지속된 산샤댐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유적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과 건물들이 개발 논리에 허물어지는 속에 가족을 찾으려는 남자와 남편을 찾으려는 여자가 각각 만나는 사람들, 고단한 생활, 아수라장 속에서도 인연의 끈을 이어나가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려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들...가끔씩 나타나는 환타지적인 장면은 유려한 오프닝과 다소 놀라운 엔딩 장면과 어우러지며 기묘한 매력의 세계로 이끕니다. 지아장커 감독은 인터뷰에서 "전에는 사회적인 관계, 사회 안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역사의 변화 앞에 놓인 그런데 그 앞에서 그래도 살아야하는 사람의 문제를 다루어야 했다." 말합니다. 식견도 없고 그릇도 작은 제가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지방에 계신 분들에게는 무책임하고 무례한 말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수십명이 죽어나가는 장면을 보면서도 무덤덤한 마음이 이 영화 속에서 영웅본색을 좋아하던 쾌활한 청년의 죽음(이 죽음도 직접적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에 가슴이 미어지는 체험을 직접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밖에 영국에서 할리우드 스타인 브리트니 머피를 캐스팅해 만든 로맨틱 코미디 [러브 & 트러블]과 이세영, 추상미가 모녀지간으로 나오는 잔잔한 성장영화 [열세살 수아], 깔끔한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이누도 잇신 감독 작품으로 1960년대 청춘을 그린 영화 [황색 눈물],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중년 여성앞에 남편이 몰래 숨겨온 애인이 나타나며 벌어지는 홀로서기인 [다마모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독특한 형식의 코미디 영화 [오 마이 보스] 등이 개봉됩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