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아름다운 중독, 걷기 !!
굿멘
2007. 6. 18. 10:01
[JMnet 기획스페셜] 발바닥이 곧 날개다
“발로 쓰는 足筆은 가장 아름다운 붓…오솔길은 가장 우주적 문장” 아름다운 중독, 걷기 |
오래 걷다 보면 이마저 사람만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꽃이 피면서 북상하는 속도가 그러하고,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걷고 걸으면서 알게 됐지요. 섬진강 매화가 필 무렵부터 북쪽으로 하염없이 걷는다면 강원도 화진포까지 내내 피는 꽃의 속도로 걷는 일이요, 또한 단풍이 곱게 물들 무렵 강원도에서 남쪽으로 하염없이 걷는다면 지리산까지 날마다 남하하는 단풍의 속도로 걷게 됩니다. 사람의 속도와 자연의 속도가 모두 한걸음 한 호흡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은 걸어서 가는 것입니다. 물론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목적지에 훨씬 더 빨리 도착하겠지요. 그러나 목적지에 왜, 무엇 때문에 가는지 깊이 생각해 보면 빠르다는 것은 아무래도 대충 가는 것입니다. 축지법은 속도 아니라 정신의 경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차를 몰고 경적을 울리며, 붉은 신호등에 가슴을 치며, 끼어드는 다른 차에 욕설을 퍼부으며 허겁지겁 간다면 그것이 제대로 가는 길이겠는지요. 그렇게 만난들 그 무슨 사랑이 새록새록 샘솟겠는지요.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차로 5분이면 갈 거리를 1시간 동안 걸어서 간다면, 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사흘 동안 터덜터덜 걸어서 간다면 그것이 오히려 제대로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사랑은 속도가 아닙니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지요. 가는 길 위에서 누군가를 생각하며 사랑의 싹을 틔우고, 걸어가는 길 위에서 그를 생각하면 더 애틋한 행복이 차오릅니다. 그리하여 차를 타고 수백 번 가는 것보다 고해성사하듯 한 번이라도 걸어서 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른 길이 아니겠는지요. 도인들의 축지법이나 비보(飛步)를 별로 믿지 않았지만, 오래 걷다 보니 알겠습니다. 길가의 풀이며 지렁이며 나무며 꽃을 바라보며 걷다 문득 돌아보면 지나온 길이 아득합니다. 걸으며 마주치는 모든 것에 마음을 주다 보니 마치 날아온 것만 같습니다.
평소에 잘 걷지 않던 사람이 한 사흘쯤 걸으면 발바닥에 물집이 잡힙니다. 걷는 자세가 좋지 않거나 신발이 편하지 않으면 먼저 발뒤꿈치가 까지고, 발바닥의 면적은 누구나 비슷한데 몸무게 차이가 많이 나니 과체중의 사람부터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물론 자주 걸었거나 몸무게가 적당한 이는 물집이 전혀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침내 물집이 터지고 굳은살로 바뀔 때까지 조금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그마저 1주일 이내에 모두 해결됩니다. 고통은 순간의 엄살이요, 발이 먼저 스스로 자연치유를 하는 것이지요. 1주일 이상 걸으면 다리 근육이 단단해지고 변비로 고생하던 사람도 더 이상 아침이 두렵지 않습니다. 걸으면 오장육부가 적당히 움직이니 그 기능이 활발해질 수밖에요. 비로소 잃었던 직립보행의 자세를 되찾게 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주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걷는다는 두려움과 통증에만 온통 마음을 주다 어느새 통증이 사라지니 걷고 걸으면서 세상 만물과의 소통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발 밑의 개미와 풀꽃과 바람과 구름과 하늘과 대화가 시작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지순하고 지순한 바로 그대가 됩니다. 모두 다르지만 또한 모두 같은 다양성의 차이와 동일성에 대해 알게 됩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경지라고 할까요?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그대 아닌 것이 없게 되지요. 그리하여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빠른 길입니다. 1시간에 겨우 10리를 가는 길이 얼마나 눈부신 속도의 길이며, 1시간에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랑의 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길입니다. 경청하고 또 경청하며 걷는 길 누구나 손가락의 지문이 다르듯 발의 족문(足紋) 또한 다르지요. 비록 맨발이 아니고, 아스팔트 길이 대부분이니 실제로 길바닥에 족문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기 다른 족문이 모여 마침내 길이 됩니다. 길은 수많은 발자국의 화석입니다. 산짐승의 길은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발자국을 덮으며 마침내 길이라는 화석이 되는 것이며, 사람의 길 또한 누군가의 발자국을 덮고 덮으며 마침내 길이라는 화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파 보면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 찍어 놓은 발자국의 화석이 나이테처럼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 발자국 화석들의 주인이나 오늘도 새로운 발자국을 신화처럼 찍어내는 우리의 눈빛이 뭐 그리 다르겠는지요. 그리하여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공 초월은 대단한 경지가 아니라 날마다 단지 두 발로 걷는 것으로 지금 바로 여기서 언제나 확연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이지요. 3년 전 ‘생명평화탁발순례’ 1만 리 길을 걸으면서도 사실 생명은 무엇이며, 평화는 또 무엇이며, 탁발과 순례는 또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슬로건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걷는 것이었습니다. 해답은 다만 두 발로 걸어보는 것에 이미 다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한 발 한 발 내딛는 바로 그곳들, 온 세상의 두두물물이 종교적 성지보다 더 소중한 성지이니 당연히 몸과 마음을 한없이 낮추는 순례일 수밖에 없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공기며 물이며 햇살을 공짜로 얻어먹는 것이니 겸허한 걸인이 되어 탁발할 수밖에 없고, 그리하는 순간 생명과 평화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니 굳이 목소리 높여 생명평화를 이야기할 것이 따로 있겠는지요. 경청하고 또 경청하며 걷는 길 위에서 두 발은 왜 두 발이며, 두 손은 또 왜 두 손인지 생각했습니다. 두 귀와 두 눈과 두 콧구멍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하나의 입과 하나의 성기와 하나의 항문에 대해 오래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것들이 서로 뒤바뀌어 한 발, 한 손, 한 귀, 한 눈, 한 콧구멍이고 두 개의 입, 두 개의 성기, 두 개의 항문이었다면 하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상상인지요. 양말을 벗고 두 발을 봅니다. 참 못생긴 발이지만 머나먼 길을 돌고 돌아 예까지 묵묵히 함께 한 두 발을 만져봅니다. 두 눈으로 볼 것 못 볼 것 다 보는 동안, 두 손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쓸 것 안 쓸 것 다 쓰는 동안, 두 귀로 들을 것 못들을 것 다 듣는 동안, 한 입으로 먹고 또 먹으며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동안 두 발은 두터운 양말과 신발 속에서 부르트고 또 부르트기만 했습니다. 느림, 그리고 마음의 속도 인제야 족적이나 발자취라는 말의 뜻을 알겠습니다. 인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족적이 아닌지요. 우리가 자주 잊고 사는 ‘발의 기억’이 바로 인생의 나이테입니다. 발의 기억을 따라가면 우리의 인생살이가 훤합니다. 내가 쓰는 지금의 이 글은 머리와 심장과 손으로 쓰는 듯하지만 사실은 발의 기억의 일부요, 발로 쓰는 족필(足筆)입니다. 이 세상에 족필보다 더 좋은 붓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은 족필로 쓰는 것이요, 그 족필의 문자는 두 발로 걸어서 가는 길의 문자입니다. 이 세상에 새겨진 오솔길이야말로 우주적 문장이 아니겠는지요. 그리하여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한가하게, 둘러보며 만만디 걸어가다 보면 비로소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빨리, 서둘러, 정신없이, 앞만 보고 가는 길에는 자주 붉은 신호등만 켜질 뿐이지요. 빠르다는 것은 직선의 마음으로 오직 결과와 표적지, 그리고 죽음뿐입니다. 가는 길, 즉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이 거꾸러질 때까지 우리의 등을 밀어붙이는 것이지요. 직선과 곡선의 조화 없이 어찌 그림이 되고, 속도와 반속도의 조율 없이 어찌 노래가 되겠는지요. 전화보다 편지가 반갑고, 보일러보다 군불 지핀 토방이 더 아늑하고 따뜻한 법입니다. 2000년에는 낙동강 1,300리를 걷고, 2001년에는 지리산 850리를 걷고, 2003년에는 부안에서 서울까지 틈틈이 삼보일배를 도우며 걸은 적이 있지요. 차로 달리면 이틀 거리를 100일이 넘게 걸렸으니, 어쩌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참으로 행복했던 ‘꽃시절’이 바로 이 도보순례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걷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의 기도이자 세상 만물과 비로소 하나 되는 마음의 눈을 뜨는 일이었지요. 내가 지리산에 온 지 10년 만에 새롭게 알아차린 것이 있다면 이것뿐입니다. 기차가 아무리 빨라도 레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전기가 제아무리 빨라도 전깃줄을 넘어서지 못하고, 휴대전화가 제아무리 빨라도 배터리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지요? 시간에 쫓기듯 살면 그 시간은 더욱 속도를 더해 빨라지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면 시간도 따라와 아주 오래된 동무가 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시간이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지요. 단 하루를 살아도 100년이 부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풀과 새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도 결국 마음의 속도 때문이지요. 느리게, 천천히, 여유롭게, 한가하게, 둘러보며 만만디 걷다 풀꽃의 낮은 키로 엎드려 말을 걸면 풀꽃도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나무를 껴안고 오래 있다 보면 그 나무의 가슴 떨리는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섬진강변에 앉아 흐르는 물에 귀를 기울이다 일어나 산책을 합니다. 강물의 속도로, 내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의 속도로 걸어갑니다. 문득 2003년 가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이원규의 지리산 가을편지’가 생각납니다. <오솔길 단상>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섬진강변 오솔길을 걸어 아침저녁으로 노을지는 그대에게 갑니다. 가고 또 가도 이 길은 끝이 없습니다. 이따금 쪼그리고 앉아 길을 파 보면 그 속에 이미 그대를 향하던 옛길이 숨어있고요. 전생과 내생으로 탯줄처럼 이어진 이 길은 아주 오래된 발자국들의 화석입니다.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기차가 제아무리 달려도 종착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전기가 제아무리 빨라도 전봇대와 전깃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쁜 숨 몰아쉬며 세상을 둘러보면 새의 길은 허공이요, 두더지의 길은 땅속이요, 물고기의 길은 물속이지요. 그러나 원통하게도 우리의 길은 갈수록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의 길입니다. 자꾸 넓어지고 더 빨라지는 동안 길 위에서 길을 잃고 인간의 길 위에서 죄 없는 야생동물들이 죽어갑니다. 이제 남은 것은 길을 지우는 일. 물고기는 헤엄을 치며 저의 지느러미로 물속의 길을 지우고, 새는 날며 저의 깃털로 공중의 길을 지우지요. 마침내 나도 길을 지우며 처음처럼 가리니 그대 또한 길이 아닌 곳으로 천천히 걸어서 오시기 바랍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자주 가던 길도 걸어서 가보면 날마다 ‘처음처럼’이지요. 처음처럼이라는 말은 이미 온 길을 지우고 날마다 새로운 길을 만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또한 이렇게 길을 지우며 걸어 가듯 날마다 처음처럼이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리하여 오늘은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그대의 부르튼 맨발에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사랑한다는 것은 오체투지의 자세로 낮게 낮게 엎드려 그대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일, 이보다 더 지극한 마음이 있을까요. 한 하늘 아래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 벅찬 연민, 이 소중한 연민의 사랑이야말로 또 하루를 살게 하는 ‘정신의 흰 밥’입니다. 수직적 관계의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수평적 연민, 이는 종교보다 더 높은 것이 아니겠는지요. 지난겨울 해거름의 섬진강변을 걷다 청둥오리 떼를 만났지요. 강물을 박차며 날아오르는 새떼를 보면서 문득 나도 한번 날아보고 싶었습니다. 훠이 훠이 날아 강을 넘고 산을 넘어 당장에라도 그대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나 청둥오리의 빛나는 날개에 넋이 빠졌다 문득 뒤로 쭉 뻗은 두 다리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 다리가 없다면 새들이 어찌 날아오를 수 있었겠는지요. 그동안 온통 시기심에 빠져 새들의 날개만 생각했지 새들의 맨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지요. 강물을 박차며 날아오르는 청둥오리의 시린 두 발, 겨울 창공의 두 발을 바라보며 어쩌면 뼛속까지 차가울 그의 발등에 문득 입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그대의 두 발은 오늘도 여여하신지요? 하루 종일 헤엄치느라 고단했을 청둥오리의 차가운 물갈퀴, 신발이나 양말도 신지 않은 그 두 발을 바라보며 그대의 발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같은 밤에는 잠들기 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족탕을 하면 참으로 좋겠지요. 뜨겁지 않을 정도의 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마에 살짝 땀이 날 때까지 기다리면 그것이 바로 몸살 기운을 잠재우는 것이요, 막힌 기를 여는 것입니다. 먼저 내 몸의 기가 막히지 않아야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하겠지요. 그동안 나는 참 많이도 걸었습니다. 오직 걷기만 한 셈입니다. ‘걷자, 만나자, 만나서 생명평화를 이야기하자’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생명평화탁발순례’를 했지요. 지리산과 한라산, 부산과 울산 등 경남지역 곳곳을 둘러보는 데 300일이 걸렸습니다. 장장 1만 리 길을 가면서 도처에서 그대를 만났습니다. 세상사 두두물물이 바로 그대였습니다. 그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아니라 늘 그대에게 도착하는 마음으로 마냥 걸었지요. 돌아보면 실로 먼길을 돌아서 왔습니다. 예까지 오는데 반생이 걸렸으니 이제 다시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변방에서 많이 침침해진 눈으로 바라보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무량합니다. 하지만 멀어지고 잊힐수록 나는 비로소 내 자리로 돌아온 듯한 느낌입니다. 태풍이 불어도 휘둘리지 않고, 폭풍 전야의 고요하고 고요함 속에 휩싸여도 두렵지 않고, 아무도 나를 찾는 이 없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소식이 다 남의 일이자 곧 나의 일임을 간신히 알겠으니, 남의 일이라고 소 닭 보듯 하지도 않고, 세상 모든 일이 마치 나의 일인 양 징징거리지도 않습니다. 마치 수령 500년의 당산나무처럼, 스스로 그러하듯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마다 잎을 피우며 속으로 천천히 나이테를 만드는 동안 그늘이 더욱 깊어진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처럼 말입니다. 아니, 느티나무처럼이 아니라 어쩌면 그 느티나무의 둥치 속으로 자꾸 내 몸을 밀어넣는 무임승차의 꿈을 꾸는지도 모르지요. 겉늙지 않고 속으로 알차게 늙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랴마는, 생의 시계는 양적인 시간으로만 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 보는 것이지요. 알차게 속으로 늙는다는 것은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는 상식에 기꺼이 발을 맞추는 것이며, 한걸음 한걸음 무덤으로 가는 길 위에서 조금씩 더 여유롭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닌지요. 가더라도 머리가 먼저 가면 교만이라는 지식의 올가미에 걸리기 쉽고, 또 가슴이 먼저 가면 격한 싸움 뒤의 우울증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더라도 먼저 발이 가고 온몸이 가고 머리와 가슴이 뒤따라가야 하겠지요. 행선(行禪)의 원리가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눈을 들어 먼 곳을 탐색하기보다 한걸음 한걸음 발바닥에 집중하는 것,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렇게 걸어 보면 발바닥 아래 풀씨가 꼬물꼬물 움트고 마침내 발자국마다 꽃이 피겠지요. 매일 가는 길도 이렇게 처음 가는 길이라면 날마다 꽃길이겠지요. 처음 가는 길, 날마다 꽃길 가다 돌아보면 어느새 지나온 길이 아득하고, 사람의 걸음걸이가 마치 날아온 것처럼 엄청난 속도의 비보(飛步)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탐진치에 걸려 나자빠지지 않는 무애의 길 위에서 돌아보면 발바닥이 곧 날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날개가 없는 것은 직립의 발바닥이 있기 때문이 아닌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발바닥이 곧 날개입니다. 그대의 맨발에 입을 맞추고픈 봄밤입니다. 길 위에서 주운 시 한 편을 첨부합니다. 졸시 <길이 길을 막다> 전문입니다. 먼길을 걸어보면 알리라 길이 오히려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오래 걸어본 자는 알게 되리라 고속질주의 차도에 사람의 길이 막히고 사람의 길에 야생동물의 길이 막히고 있다는 것을 그대의 마을까지 걷고 걸어서 가려면 위험천만 먼저 목숨부터 내놓아야 하나니 그대 또한 내게로 오는 길이 그러하고 그러하리라는 것을 허공의 새들에게도 길이 있고 물속의 고기들에게도 길이 있듯이 무심한 바람에게도 길이 있어 아무 절에나 들어가 아무 풍경을 울리지 않고 지상의 수많은 별들이 떠올라도 아무 십자가 위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달마다 천 리 길 해마다 만 리 길을 걸어보면 알리라 길이 없는 곳에 길이 있고 종교가 없는 곳에 종교가 있고 농민과 아이들이 없는 곳에 농촌이 있고 정치인이 없는 곳에 국회가 있고 대통령이 없는 곳에 청와대가 있다는 것을 고속도로에 당산나무가 쓰러지고 골프장 그린 홀 속에 조상들의 무덤이 있고 대형 댐의 깊은 물속에 살구꽃 지는 고향이 있나니 길이 길을 막아 그 길 위에서 목놓아 우는 이들이 어찌 생명평화의 탁발순례단뿐이랴 밥을 주면 밥을 먹고 돌을 던지면 돌을 맞는 순례단이 지치고 아플 때마다 손짓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밤마다 머리맡에 다가앉아 우는 여인이 있었으니 노고단의 마고선녀신가 백록담의 설문대 할망이신가 여전히 맨발의 어머님이신가 마침내 걷고 걸어서 일체원융의 동그라미를 그렸나니 지리산에 그 둘레가 1천5백리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다시 한라산에 1천리 동그라미를 그렸나니 무시(無始)의 먼길을 걸어보면 알리라 길이 길을 막는 게 아니라 길이 길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무종(無終)의 오랜 길을 걸어보면 알게 되리라 한걸음 또 한걸음 이보다 더 빠른 길은 이승에 없나니 발바닥이 곧 날개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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