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명화

화려한 휴가

굿멘 2007. 7. 11. 09:36
남상석기자의영화이야기

화려한 휴가

전두환이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며 새로운 대통령으로 등장한 1980년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 해 5월 광주는 저의 머리 속에는 정부와 언론이 규정한 ‘광주사태’라는 이름으로 입력됐습니다. 신문은 ‘간첩과 불순분자 세력이 준동한 소요 내지는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정부가 불러주는대로 기사를 실었고 방송 뉴스는 ‘폭도’들의 습격으로 불타는 언론사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 때문에 내려온 외삼촌이 ‘정부 발표로는 사망자가 백 여명이라는데 실제로는 수 천명이 넘는다더라’ 등의 흉흉한 내용을 아버지에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을 때 외삼촌이 그 불순분자 가운데 한사람이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해 접한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시의 참혹한 사진들과 외신이 촬영했던 영상, 각종 글 자료집을 통해 광주의 ’실체‘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캠퍼스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가실 날이 없었고 그 농도는 매년 5월이면 더욱 심해졌습니다.

올해 초 개봉한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을 보며 속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시절을 직간접으로 겪었던 중장년층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공감을 했지만 젊은 층이 주류인 관객들은 이 영화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취업난 속에 먹고 살길 헤쳐나가느라 바쁜건 알겠지만 가까운 역사적 사실에 무관심한 젊은 세대들에게 야속한 마음을 느낄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5.18을 다룬다는 [화려한 휴가]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한편으로는 기대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많이 됐습니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어떻게 풀어낼 것이며 10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다는데 산업적인 측면에서 본전을 뽑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 때문이었습니다.

7월 26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화려한 휴가]는 지난 5일 서울에서 언론시사를 한 뒤, 6,7,8일에는 감독과 배우들이 각각 대구, 부산, 광주를 돌며 5천명 규모의 대규모 지방 순회 시사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부산 시사회를 취재했는데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의 대다수 관객들이 웃고 눈물을 흘리는 등 호응이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습니다. 영화를 본 뒤 인터뷰에서 광주의 한 중학생은 자신의 아버지가 당시 시민군이었다며 ‘다른 지역 사람들 가운데 일부 분들이 5.18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이 사건이 제대로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높은 정치의식을 보여줬습니다.

5.18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학생들과 젊은 관객들은 일종의 ‘전쟁 혹은 재난영화’로 읽고, 그 시절을 지나온 중 장년층 관객들은 ‘역사 영화’로 읽는 것 같더군요. 부산에서 인터뷰한 한 여고생은 영화 어땠냐는 질문에 “전쟁 영화인데요. 가족들끼리 사랑하는 사람끼리 끝까지 지키려고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러는게 정말 슬펐어요.”라고 벌건 눈으로 대답했습니다. 5.18을 ‘전쟁’으로 언급했습니다. 영화 관계자들 가운데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이 현대사를 소재로 하면서 대중적으로 잘 풀어내 대박을 낸 경우처럼 이 영화도 그럴 조짐이 보인다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예측을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부모를 여의고 택시 운전을 생계로 삼으며 공부 잘하는 동생 진우(이준기)가 서울 법대에 합격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민우(김상경)는 진우가 다니는 성당에서 만난 천사같은 간호사 신애(이요원)를 만나 첫 눈에 반합니다. 입심 좋은 동료 택시기사 인봉(박철민)이 연애 코치를 자처하며 해준 조언대로 야유회도 가고, 영화도 같이 보며 풋사랑을 익혀가고 있는 도중, 계엄군이 무차별로 시민들을 폭행하고 급기야는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펴지는 가운데 시민들을 향해 발포를 시작하고 광주는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 진우가 목숨을 잃자 민우는 자진해 무기고를 습격해 총을 들고 시민군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비극이 벌어지기 전까지 영화의 전반부는 당시 서민들의 소박한 모습을 유머와 코미디를 섞어 있는 그대로 촌스럽게 묘사합니다. 학생운동가나 야학교사 같은 지식인들은 영화의 내용에서 정치성이 탈색된 것처럼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서민들, 치열한 정치 의식이나 역사적 소명 같은 거창한 대의명분 보다는 내 가족이, 사랑하는 사람이, 동료가 어떻게 됐는지에서 시작된 경우가 더 많다는 증언록 등 자료를 토대로 한 제작진의 조사결과를 반영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한 실력을 닦은 박철민, 박원상 두 조연 배우들의 코믹 감초 연기는 그 자체로만 떼어놓고 보면 오버일 수 있지만 한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영화를 심연에서 끌어올리며 대중적인 눈높이에서 몰입해서 보게 만드는 막중한 기능을 합니다. 

대구에서 나서 자라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김지훈 감독은 ‘아무리 상업적으로 풀었다지만 비극적인 사건에 코미디가 너무 강한 것 아니냐?’는 기자 질문에 “제가 영화를 준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찾으면서 놀랐던 것은 그 아픔의 시간 속에 해학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극한의 슬픔에 가면 그 자체가 찬란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슬픔을 타인에게 전이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아픔을 숨기는 사람들의 배려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영화에 나오는 유머스럽고 코믹한 장면들은 독자적인 유머나 코믹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 나의 아픔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으려는 이해심, 그래서 그 아픔으로 갈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들의 평범하고 촌스런 연기와 에피소드들은 막판 도청 진압작전의 비극성을 더해주는 복선으로 작용합니다.

당시 평범한 청년을 연기한 김상경과 착하고 소박한 간호사로 나오는 이요원, 정치군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퇴역한 예비역 대령이자 자애로운 택시회사 사장역의 안성기 등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물론 조연들의 연기도 탄탄합니다.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학생들을 몸으로 막아서던 선생님(손병두)도, 앞 못보는 처지로 아들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노모(나문희)도 주연 못지않은 탁월한 연기와 무게감으로 영화의 감동을 더해줍니다. [열혈남아]에서 연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설경구를 제압할 정도였던 나문희 선생님의 원숙한 연기 카리스마는 표현할 단어를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영화를 본 일부 사람들이 주인공 세 사람만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거나 이야기 전개가 세련되지 못하다거나 복잡하고 큰 역사적 소재를 다 담지 못했다는 등 완성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5.18을 둘러싼 다양한 요구와 희망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두 시간 짜리 영화로는 턱도 없고 수십부작 대하드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상처와 사건을 스크린으로 불러내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면서 역사적 교훈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이든 사람들 뇌리에서는 점점 잊혀져가고 있고 젊은 세대는 무관심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이고 이 의도가 잘 유지되도록 균형을 잡은 제작진의 노고에 고개를 숙이며 또 하나의 부끄럽지 않은 영화가 좋은 호응을 얻고 그것을 기사로 쓸 수 있기를 조심스럽지만 간절하게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