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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고장으로 떠나다

굿멘 2007. 9. 14. 14:18
소믈리에, 와인의 고장으로 떠나다

프랑스 와이너리 스토리
editor 김현명 writer&photographer 박은애(소믈리에

소펙사(SOPEXA, 프랑스 농식품진흥공사)가 주관하는 제6회 한국소믈리에 대회에서 최고의 소믈리에로 뽑힌 5명의 소믈리에들이 보름 동안 프랑스 와이너리 투어를 떠났다. 보르도, 프로방스, 알자스 지방의 26여 군데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돌아온 홍일점 박은애 소믈리에가 그 보름간의 이야기를 보내왔다.

보르도의 샤토 오 라그랑주Haut Lagrange
장장 13시간의 비행이었다. 좁은 이코노미석에 꼼짝없이 갇힌 불쌍한 내 엉덩이를 위해 자세를 수십 번 고쳐 앉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무릎을 수백 번 접었다 폈건만 비행기는 좀처럼 착륙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서야 도착한 파리 드골 공항. 드디어 와인의 고장 보르도 땅을 밟았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온통 포도밭과 옥수수밭이었다. 낮은 언덕 하나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땅 끝엔 지평선이 걸려 있었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 라그랑주는 규모는 작지만나름의 철학을 고집하는 정통성 있는 샤토다. 지역을 막론하고 모던 스타일의 와인이 유행처럼 번진 요즘 오 라그랑주는 고집스러울 만큼 보르도만의 테루아르(와인의 개성과 품질에 영향을 주는 제반 환경)를 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모든 양조는 옛 방식과 기준을 고수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주 농익은 포도를 숙성시키는 여느 샤토와는 달리 와인의 산도, 질감과 당도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 적당히 익은 포도로 양조를 하고 있었다. 양조장과 포도밭을 둘러보고 간단하게 시음을 한 후 오너인 프란시스가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그의 셀러 안에 있던 오 라그랑주Haut Lagrange 98, 96을 마셨다.

우드 계열의 향과 향신료 향이 올드 빈티지 느낌을 주면서 붉은 과일 향이 지루한 향에 탄력을 주었다. 프란시스의 말처럼 오 라그랑주 와인이 장수할 수 있도록 산미라는 굵은 뼈대를 심어서인지 적당히 녹은부드러운 타닌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구조감이 느껴졌다.

보르도 시내는 온통 와인숍 천지다. 주민의 1/6이 와인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만큼 시내 어느 와인숍에 들러도 질 좋은 와인을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보르도 와인의 테루아르를 결정한다는 지롱드 강을 바라보며 입과 향으로 와인을 즐기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인간의 노력과 노하우도 와인의 맛과 질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테루아르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프로방스의 샤토 비뉴로르Vignelaure
니스 공항에서 프로방스까지는 줄곧 해안 도로를 달렸다. 멀리 보이는 유럽 제일의 휴양지인 니스 해변과칸 해변에 내내 시선을 빼앗겼다. 해변은 휴가를 즐기러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옥색 바다와하얀모래사장 위로 부서지는 태양은 이색적이기는 하지만 나무를 까맣게 태울 만큼 치명적이다.

해변을 지나 다다른 프로방스의 샤토들은 대부분 규모가 큰 와이너리였다. 포도나무를 둘러싼 빨간 장미 덩굴과 화려한 정원은 호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프로방스산 와인은 과일 향이 풍부하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13가지 품종으로 화이트, 로제,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데 로제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한다.

수확은 주로 밤에 이루어진다. 건조하지 않고 습기가 있어서 포도알이 안정을 취하는 밤에 수확하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로제 와인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프로방스의 와이너리 견학은 로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전환점이 됐다.

가장 인상적인 샤토는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에 자리한 샤토 비뉴로르Chateau Vignelaure였다. 프로방스에서 가장 오래된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보르도의 그랑크뤼 포도원의 카베르네 쇼비뇽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양조 학자가 보르도와 프로방스의 양조 방식을 접목해 로제와 레드 와인만 생산하고 있다. 연어 살색에 가까운 투명한 빛의 로제 와인은 여느 로제처럼 프레시한 느낌이면서 스파 이시한 후추 향이 돌았다. 레드 와인은 카베르네 쇼비뇽의 함량이 60% 이상으로 보르도 스타일의 와인을 연상시킨다. 다른 곳의 와인도 좋았지만 이곳의 와인맛은 특히나 감동적이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와인을 마시니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사스의 샤토 바인바크&트림바크Weinbach&Trimbach
알사스는 보르도나 프로방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아기자기한 가옥과 영화에서나 보던 경사진 포도밭이 눈을 즐겁게 하는 알사스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많은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콜마르Colmar에서 북쪽으로 30분가량, 케엔츠하임Kientzheim이라는 마을의 포도밭 가운데 바인바크-폴러Weinbach-Faller라는 도멘이 나타난다.

형형색색의 꽃으로 꾸민 이 예쁜 샤토는 세 모녀가 양조와 운영을 맡고 있는데 선반과 벽에는 가족사진이 가득했다. 알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와이너리는 이처럼 가족이 경영하는 곳이 많다. 주인이 따로 있는 곳도 있는데, 새 매입자들은 와인의 전통과 그 집안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살리고자 그 가족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착하자마자 피노 블랑Pinot Blanc 시음에 들어갔다. 다부진 몸에 피부가 검게 그은 안주인처럼 와인에서도 생기가 돌았다. 목넘김 후에는 약간 쌉싸래하면서 개운한 느낌이었다. 뮈스카 달사스Musca d’Alsace 30%, 뮈스카 오토넬Musca Ottonel 70% 블렌딩으로 만든 이 와인은 맛이 상큼하고 섬세하다. 여자들이 만드는 와인이어서 그런지 모든 와인에서 풍부한 질감과 볼륨감이 느껴졌다.

중세 때 가슴을 반쯤 드러낸채 강한 자존심과 도도함을 풍기던 요부 같은 느낌이랄까? 오일리한 질감과 달콤함 뒤에 적당한 산미라는 골격이 있어 절대 당이 와인을 지배하지 못한다.

이와 상반되게 샤토 팀바크Trimbach의 와인은 굉장히 남성적인 느낌이다. 양조 학자인 형과 동생이 함께 소유하고 있는 이 도멘은 1626년부터 가족경영을 시작해 현재 12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30ha 규모의 포도밭은 수령이 45년 이상 된 포도나무들로 이루어졌으며, 생산량의 70%는 포도를 구매해 양조부터 책임지는 네고시앙 와인을 만든다.

대부분의 와인이 잔당을 남기지 않고 드라이하면서 골격이 단단하다. 마치 벽돌을 쌓아 올린 듯 정돈된 느낌이다. 특히 이곳 최고로 꼽히는 ‘클로 생트 윔Clos Sainte Hume’은 드라이 리슬링의 진수를보여준다. 석회질이 풍부한 토양에서 자란 포도는 젖산 발효를 하지 않고 잔당 또한 남기지 않는다. 평균 700병을 생산하는데 장기 보관이 가능하다.

가장 흥미를 끌었던 와인은 피노그리 오마주 아 잔 2000Pinot Gris Hommage a Jeanne 2000으로, 그들의 할머니가 100세가된 2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와인이다. 예외적으로 잔당을 18% 남긴 와인으로, 구수하면서 오일리한 꿀향이 느껴지는 와인으로 희소성에 대한 값어치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에게 와인은 생활 그 자체
오롯이 와인만을 위한, 와인에게 집중한 와이너리 투어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고 가르쳐주었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 새롭게 진화해가는 양조 방법들을 수많은 와인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배우는 기회였다. 프랑스인에게 와인은 삶 그 자체다.

우리가 좀 더 맛있는 밥을 지어 먹기 위해 좋은 밥솥을 사용하는 것처럼 프랑스인은 좀 더 맛있는 와인을 마시기 위해 양조 기술을 발전시켜나간다. 프로방스에선 어딜 가나 이런 얘길 듣는다. 와인은 골머리 썩이며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즐기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