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특별한 책>란에 글을 쓰게 되었다고 내심 뿌듯해하고 나니 며칠째 한숨만 난다. 지금이 한 스물 두엇쯤 되었더라면 네 장이고 다섯 장이고 기고만장하게 써 내려갈 텐데, 이 나이 먹도록 여전히 편식 같은 독서를 반복하는 초라한 실정을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러다간 중간고사 문제도 못 내게 생겨서 얼른 다잡아 용기를 내어본다. 각설하고 단언컨대, “책은 지금까지 변함없는 나의 든든한 후원자다”라고 말하겠다. 특별히 몇 권의 책만이 아니라 삼십 년의 지난날, 쪽마다 어떤 형태든 글자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아무리 놀 사람이 없어도 책은 군말 없이 나랑 놀아주었고, 때론 인형놀이의 집터를 마련해 주기도 했으며, 라면받침이거나 베개이기도 했고, 나를 키워준 자양분이기도 했다. ![]() 다시 ‘앤’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연인진 몰라도, 앤과 나는 무척 많이 닮았다. 나도 다이나의, 눈처럼 흰 피부와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를 원했고, 또래 아이들처럼 유행에 맞는 옷을 입고 싶었다. 지금은 영화배우 ‘명계남’ 덕에 많이 알려진 이름이지만 좀처럼 출처를 알 수 없는 내 이름 대신 세련되고 예쁜 이름을 갖고 싶었다. 앤처럼 날마다 일기를 적어 나갔고 나무와 숲에 이름을 붙이는 일까진 하지 못했지만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혼자 노래를 불렀다. 기하학을 비롯한 수학을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고 이성을 자각할 무렵쯤엔 ‘길버트’ 같은 놈과의 연애를 꿈꾸기도 한 것 같다. 철없고 못생긴 말라깽이 소녀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럴 듯한 로맨스에 적당히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며 ‘곱슬머리에 이름이 불만인 시골뜨기’의 미래도 매직 스트레이트처럼 죽죽 펴지길 기대했다. 그 또래 소녀가 다 그런 건진 몰라도 『소공녀』나 『비밀의 화원』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공상이었기에 더 애착했고 덕분에 앤은 내가 철이 들어 세상 찬 맛을 좀 알 때까지 나를 마시멜로우 같은 폭신한 공상으로 안심시켜 주곤 했다. 검붉은 빛 양장본 표지에, 멋진 금박의 영어 필기체 제목, 타자기 글씨체 10포인트 정도의 12권(으로 기억한다. 11, 12권이 다른 사람들의 얘기였던)짜리 전질이라…. 어쩌면 그 외양만으로도 나를 흥분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 끝없이 서늘하기만 한 젊은 시인의 내면을 어쩌면 그렇게 아름다운 비유로 표현할 수가 있는지. 마지막 시였던 ‘엄마 걱정’은 시어 하나하나가 모두 보석 같았다. 단어마다 물씬 풍기는 어둠의 냄새를 맡으며 오히려 나는 희망을 배웠다. 그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쓰러진 약병 같은 아버지’는 마침 내 생일을 맞아 거친 수술대 위에서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내 아버지였고, 나는 울음 대신 어쭙잖은 시어로 내 상황을 객관화했다. 덕분에 그해 여름 시화전엔 내 가정사를 투영한 한 편의 시를 내걸었고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던 언니는 웬일인지 아무 말 없이 돌아가 버렸다. 그래도 나는 엉킨 시어를 바라보며 자신을 위무했고, 어느새 부쩍 자라 있었다. ![]() 그는 알래스카의 막다른 벼랑에서라도 불꽃을 피울 사람이었다. 첫 시가 펼쳐지기도 전 “나는 나의 미래와 모험에 적금을 붓는다”라는 건방진 그의 서문은 내게 치기 어린 용기를 듬뿍 전해주었다. 그의 시 중 지금도 아무 데서나 잘 써먹고 잘 외우는 시가 ‘적설(積雪)’이다. 「겨울 자작나무 숲에서 너, 견디고 있구나. 천국엔, 세금과 고통이 없어 싫다는 이 한 몸 끝까지 견뎌야 사랑이다. 검은 기중기의 눈발이 쏟아진다.」(시 전문) 눈밭에서 끝없이 떨며 무거운 눈발을 감당하는 자작나무 한 그루. 그 와중에도 따뜻한 천국은 재미가 없다는 그의 호언장담은, 마침 덜컥 입학한 사범대에서 조금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게 등교의 이유를 조금은 마련해준 것 같다. 그의 시 속에서 사람은 태어난 게 아니라 던져졌다. 어쩔 수 없이 떨어진 것에 대해 빠르게 체념하고 대신 지구라는 썩은 땅덩이에서 살아남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다잡는다. 세상을 견뎌냄. ‘계속 살아야 한다’ ‘살기 위하여’ 등의 제목으로 이어지는 반복된 외침은 나의 심장을 좀 더 단단하게 했고, 대신 근원의 모성을 노래한 ‘연어川’이나 한 편의 판타지 같은 표제시 ‘바다로 가는 서른세 번째 길’은 내 안에 남아있는 따뜻한 꿈의 기억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그리고 문학이 사람을 어떤 형태로든 행복하게 만드는 기제란 걸 인정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나라는 사람은 책 자체에 대한 호불호보다 그 책을 읽을 당시의 정황과 흡인 정도에 따라서 다분히 주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내가 소개하는 책은 정말 내 인생‘만’의 특별한 책인 셈이다. 그래도 오르고 내리는 경계의 시점마다, 다른 게 아닌 책이 나와 함께 있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잘(?) 자라주었으니 말이다. 이제 교직 7년차에 접어든 나는 처음 만나는 아이들에게 주저 없이 나의 별명을 소개한다. “나는 닭샘이다. 닭 계(鷄) 자에 사내 남(男) 자를 쓴다. (실제는 계수나무 계(桂) 자를 쓴다. 오해 없으시길)” 웃긴다며 깔깔대는 아이들의 눈에서 간혹 나를 볼 때가 있다. 그 아이가 겪는 어둡고 긴 터널도 보이는 것 같다. 그 속에 손을 내밀고 싶다가도 정말 이것이 그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 되짚어보곤 한다. 다만 내게 긴 시절을 함께 할 친구가 있었듯 그 아이에게도 책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한다. 선생으로서의 전통적인 바람이라기보다는 순수한 내 경험의 발로로써 말이다. 혹은 그 아이의 불행 중 하나가 책에서 멀어진 환경 자체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했던 수많은 ‘외롭고 높고 쓸쓸한’(필자 주: 안도현의 시집 제목) 생각 중의 대개는 한 권의 책과 함께 사그라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책은, ‘내 아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이름 붙여진 그것… 오랜 나의 친구였다. ---------------------------------- ![]() 요즘엔 지속적으로 아줌마와 애 엄마라는 호칭이 추가되어 좀 더 뻔뻔해지고 노글노글해졌다. 나름 1인 3역을 해대느라 맥주 마시며 블로그질에 매진하지 못하는 요즘이 조금 불만이나 <내 인생의 특별한 책> 청탁을 받곤 기고만장한 상태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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