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아버지 ! 이시대,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힘.

굿멘 2007. 6. 1. 10:26

30년도 더 지난 1970년대의 어느 지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삿짐 트럭을 타고 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세 아들과 함께 택시에 올라 고향집을 떠났다. 사업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할 당신은 택시에 오르고, 지아비 뒷바라지에 뼛골까지 빠질 지경이었던 어머니는 트럭을 지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언어도단도 그런 언어도단이 없다. 훗날, 아버지는 그때의 섭섭함을 토로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사업에 실패한 것이 끝이 아니었다. 낯선 타향에서 살기로 했으니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서 집도 얻어야 하고, 일자리도 알아봐야 하고… 당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은가.”


어머니는 그때 이삿짐 트럭을 둘러싼 빚쟁이들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판단이 반드시 옳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빚쟁이들에게 둘러싸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내에게 이삿짐 트럭을 맡겨 놓고 타향을 향해 떠나다니, 일견 무책임한 당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아버지는 그렇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멀리 보는 눈을 가졌다. 당신은 실패한 그 자리의 일을 수습하는 것보다 미래의 삶을 일궈 나갈 곳의 지형도를 그리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식으로 삶을 살지만 그분들이 비난받기 일쑤인 것은 앞뒤 사정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분들은 마음속에 큰 빚을 들여 놓는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의 응어리다. 그것이 곧 이 땅 모든 가장들의 ‘아름다운 묵비권’이다.세월이 많이 흘러 그 형태는 달라졌지만 지금도 그 묵비권은 계속된다. 실례로 ‘기러기 아버지’란 말은 있어도 ‘기러기 어머니’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자녀 교육을 위해 유학을 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중 누군가가 따라가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 대부분의 아버지는 각오한다. “나야 뭐, 고시원이나 원룸을 얻어 생활하면 되지. 당신이 가서 아이를 보살피라고. 이국에 가면서 당신 고생이 많겠네.”밥은 사 먹으면 되고, 빨래는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 되고, 아플 때는 약국에 가면 된다는 배짱이 숨어 있지만 가족 없는 집에 들어가 쓸쓸하게 라면을 끓여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삶에 대한 허무는 발설하지 않는다. 국제전화가 걸려 오면 아내와 아이들 걱정을 하다가 “나야 뭐, 잘 있지. 저녁은 직원들과 함께 먹었지”라고 답할 뿐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잘한 일상 어느 구석에서든 감성의 실핏줄을 자극하는 희생의 대명사다. 반면에 아버지는 그런 대열에서 비켜나 있다. 획을 굵게 긋기 때문에 노출 빈도가 약한 것이다. 이제, 가만히 살펴보면 ‘기러기’를 택하는 쪽도 아버지고 ‘노숙자’의 길을 택하는 쪽도 아버지다. 그 선택의 배경에는 ‘나는 괜찮다. 가족이 살 수 있다면’이란 배수의 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들을 곳곳에서 본다. 겉으로는 철없는 남편, 철없는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살지만 남 모르게 흘리는 아버지들의 눈물이야말로 놀라운 부성애의 육즙이다. 작은 획을 긋는 어머니, 큰 획을 긋는 아버지, 그것이 이 시대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 소설가 임동헌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