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대신 그분들은 마음속에 큰 빚을 들여 놓는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의 응어리다. 그것이 곧 이 땅 모든 가장들의 ‘아름다운 묵비권’이다.세월이 많이 흘러 그 형태는 달라졌지만 지금도 그 묵비권은 계속된다. 실례로 ‘기러기 아버지’란 말은 있어도 ‘기러기 어머니’란 말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자녀 교육을 위해 유학을 보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중 누군가가 따라가 보살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 대부분의 아버지는 각오한다. “나야 뭐, 고시원이나 원룸을 얻어 생활하면 되지. 당신이 가서 아이를 보살피라고. 이국에 가면서 당신 고생이 많겠네.”밥은 사 먹으면 되고, 빨래는 세탁기에 넣어 돌리면 되고, 아플 때는 약국에 가면 된다는 배짱이 숨어 있지만 가족 없는 집에 들어가 쓸쓸하게 라면을 끓여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드는 삶에 대한 허무는 발설하지 않는다. 국제전화가 걸려 오면 아내와 아이들 걱정을 하다가 “나야 뭐, 잘 있지. 저녁은 직원들과 함께 먹었지”라고 답할 뿐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잘한 일상 어느 구석에서든 감성의 실핏줄을 자극하는 희생의 대명사다. 반면에 아버지는 그런 대열에서 비켜나 있다. 획을 굵게 긋기 때문에 노출 빈도가 약한 것이다. 이제, 가만히 살펴보면 ‘기러기’를 택하는 쪽도 아버지고 ‘노숙자’의 길을 택하는 쪽도 아버지다. 그 선택의 배경에는 ‘나는 괜찮다. 가족이 살 수 있다면’이란 배수의 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들을 곳곳에서 본다. 겉으로는 철없는 남편, 철없는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살지만 남 모르게 흘리는 아버지들의 눈물이야말로 놀라운 부성애의 육즙이다. 작은 획을 긋는 어머니, 큰 획을 긋는 아버지, 그것이 이 시대 한 가정을 이끌어가는 힘이다. - 소설가 임동헌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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