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사진

오르세 미술관 전

굿멘 2007. 7. 24. 09:29




 밀레의 <만종>이 한국에 왔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지난 4월 초에 시작된 오르세 미술관전을 통해 한국인들에게 선을 보이고 있는 것. 9월 중순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는 <만종> 외에도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등 교과서에서 흔히 보아왔던 명작들이 포함되어 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조만간 <모나리자>도 한국을 다녀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만종> 진품이 서울에 왔지만 “아직도 <만종> 이야기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미술사학자를 비롯한 전문가들에게 <만종>은 사실 모든 해석이 끝나 정리가 된 작품. 게다가 너무나도 복제가 많이 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이발소 그림’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만종>은 <모나리자>처럼 패러디가 되었을 때나 겨우 이목을 끄는 그런 작품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렇게 유명한 그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여러 차원에서의 가치와 의미들이 쉽게 간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정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흔히 <만종>은 ‘거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명작’ 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이 그려진 당시만 해도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보자르를 나온 아카데믹한 화가들이 화단을 장악하고 있어서 밀레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화가들은 전시회에 출품을 해도 낙방을 밥 먹듯이 해야만 했다. 오죽하면 떨어진 작품들만 모아 ‘낙선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고, 신문 지상에는 당시 그렇게 고배를 마신 화가 지망생들을 풍자하는 만평이 실리기도 했다.
인상주의전은 이런 풍자의 단골 손님이었는데, ‘임산부는 관람을 삼가주세요’라는 글과 함께 경찰관이 전시실로 들어서려는 임산부를 제지하는 그림이 실릴 정도였다. 1859년에 그려졌으니 <만종>은 150여 년 전의 작품이다. 인상주의가 공식적으로 선포되기 약 10여 년 전이니 실제로 <만종>은 사실주의 그림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주의의 한 유파인 ‘바르비종 파’ 작품이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한 40km 떨어진 바르비종이라는 작은 시골동네에서 그린 그림인데, 이곳은 나폴레옹을 포함해 프랑스 역대 군주들의 흔적이 모두 남아 있는 퐁텐블로 성과 그 주변의 숲이 유명한 곳으로 젊은 시절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도 이곳에 내려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만종>은 왜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아니 그 전에 유명한 그림과 그림의 미학적 가치는 과연 일치하는 것일까? 어쩌면 많은 이들이 <만종> 앞에서 속으로 이런 질문들을 되뇌었을 것이다. 사실 ‘임산부 출입금지’라는 만평을 통해 조롱을 당할 정도로 <만종>이 파격적인 그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화화나 성화도 아니고 역사화도 아닌 이 그림은 이름없는 가난한 시골 사람을 그린 인물 설정에서부터 문제가 많았고, 바르비종이라고 하는 파리 남부의 시골에 살며 직접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밀레가 <키질 하는 남자>를 시작으로 서서히 명성을 얻어가자 한 미국 사람이 <만종>을 구입했고, 이어 파리에서 백화점을 경영해 큰 돈을 번 프랑스인이 다시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신문기자들이 이 과정을 마치 중계방송을 하듯이 신문에 크게 보도하면서 <만종>이 유명해졌다. 밀레의 그림들은 판화로 제작되어 복제화가 범람했고, 반 고흐 역시 이런 복제화를 보며 밀레의 그림들을 복제하곤 했다. 천 프랑에 팔린 그림을 수백 배가 넘는 금액인 8만 프랑에 되사왔으니 유명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감자를 캔 다음 늦은 오후 들려오는 종소리, 즉, 만종에 맞추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밀레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밭일을 끝내고 늘 그렇게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가난한 농부들의 삶을 찬양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은 가난한 농부 부부를 통해 보잘것없는 수확에도 감사하는 경건함과 소박한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배경의 드넓은 들판과 그 끝의 성당 그리고 들판을 물들이고 있는 석양이 마치 은은한 종소리처럼 느껴지는 묘사 등이 이 그림에서 눈여겨볼 부분들이다.

 오르세 미술관전에서 볼 수 있는 명작들 이외에도 이번 오르세 미술관전에서는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과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을 볼 수 있다. 마네의 작품은 한 부대의 어린 마스코트를 그린 것인데, 에스파냐 풍의 거칠고 대담한 붓질(지금은 그렇게 볼 수 없지만, 당시로는)과 많은 화가들이 피했던 검은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배경이 생략된 점 등이 이 그림을 현대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간주하게 했다.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은 광인 화가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고갱을 기다리던 유명한 노란 집의 실내를 그린 것이다. 침실 안의 모든 사물은 보잘것없는 투박한 집기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반 고흐는 모든 물건들의 그림자를 제거했고, 과장되고 왜곡된 원근법을 통해 마치 살아 있는 사물들처럼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마치 의자도, 침대도 액자도 모두 마술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굵은 윤곽선은 사물들이 꿈틀대는 것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반 고흐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살아 있는 것들이었던 것이다. 이 예민한 감수성은 그의 생명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보험료만도 8천억 원에 달하는 이번 전시회는 하나의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꼭 보아야 할 전시회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들이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한국에서 이 많은 원작들을 대하기가 쉽지 않아서이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19세기 후반 현대 미술이 태어나기 직전, 고전주의 미술이 전체적으로 회의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의 미술품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에 온 작품들을 잘 이해하면 고전주의 미술과 20세기 현대미술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