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잠시

용서

굿멘 2007. 10. 22. 09:08

용서

헨리 나웬은
용서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한다.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원한이
남아 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 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는 쾌감을
누리고 싶은 것이다."


- 차동엽의《무지개 원리》중에서 -


* 내가 그를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화가나는 걸 보니 진정으로
용서한 게 아닌가 봅니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모두에게 마음의 평화를 선물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잘못을 이해받고 용서받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더욱 너그러워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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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복음 18장 21,22절)

중국의 무협영화를 보면 거의가 복수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 복수도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때에 못다 한 복수를 아들이 이어받고 그 아들이 못다 갚은 복수를 가문이 대를 이어 복수극을 펼치는 내용이 허다하다. 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문화가 용서에 인색하고 복수 내지 앙갚음에 치우치는 면이 있음을 말해 준다.

성경에서는 복수에 대하여 무엇이라 가르쳐 주는가? 성경에서는 물론 복수란 말 자체가 등장할리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용서의 정신으로 차 있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의 제자 베드로가 스승에게 묻기를 “몇 번씩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까?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하고 물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하시기를 일곱 번 용서가 아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면 490 번이다. 490 번이나 용서하라는 말은 무조건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면서도 흔히 말하기를 세 번까지는 용서하겠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용서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490 번에 이르도록 마지막까지 용서하라 이르신다. 그래서 성서의 문화는 용서의 문화이고 성서의 인간관계는 무조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관계이다.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하여 보아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