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랏에 가면........
달랏은 호치민시로부터 북동쪽 방향으로 308km 거리에 있는 산악 지대의 도시( 람동성 성도)로 불란서 통치 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 하여 휴양지로 만들었고 현재도 부유층의 신혼 여행지로 각광을 받는 도시 이다
도시 전체가 마치 유럽에 온 느낌을 줄 정도 이며 도시가 아주 깨끗하고 공기도 좋으며 소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나뭇잎의 색깔도 윤기가 난다. 꼭 가 보시라고 추천 하고 싶다 !! ^*^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하루 2편의 항공이 운항되며 호치민의 데탐거리의 풍짱 버스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츨발 하는 버스로 7시간 정도 걸린다.
또 신카페(여행사)에서 오전 8시에 가는 오픈 투어버스가 있다
마치 약 4-50분 정도는 한계령을 가는듯한 고불고불 산악지대 길인데 그래서 시간이 많이 소요 되는 것 같다.
달랏은 시내 관광과 시외관광 두곳으로 나누어 생각 할수 있은나
팔래스호텔이나 노보텔 에서는 관광 투어 용으로 오래된 시트로엥 승용차(60여년된 구형)로 운전 기사가 안내 해주는 투어가 있다 반나절에 약 40불 정도(1인당)인데 입장료는 본인 부담이다. 주로 박물관, 케이블카, 오래된 산사(절), 폭포,플라워 가든,중앙시장, 달랏대,타워 등인데 다니다 보면 시간상 다 가 볼 수 없다
택시를 이용한 관광도 있으나 일행이 없다면, 그리고 휴대짐이 없다면 오토바이 이용이 제일
저렴하다 문제는 처음 관광 코스를 정 하고 가격을 흥정 한 다음 출발 하는 것이 좋다
2인 이라도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편이 가장 저렴한 것 같다.
이 달랏엔 지난해 12월부터서 한국식당이 하나가 있다.
된장 찌게는 한국의 그 유명한 집의 맛 과도 비교 할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고 식당 주인이 직접 빗은 술(주정전문가)의 맛은 그 소문을 알고 찾아온 외국인, 특히 일본 손님을 보고 알 수 있을 정도의 맛이 그윽하다고 한다 (난, 교회 장로로 술 먹지 아니함)
“코리아 가든” 인데 음식점과 호텔(숙박)을 함께 하고 있다.
84-063-521-888~9 이사장님 095-805-5441
한국식당
달랏 대학교에 가면 김진국 박사와 한국어과 교수, 네분이 계신다.
교수님들께서는 한국어과 학생들(약230명)이 실습할 기회가 없어(달랏에 한국인이 많지 아니하기때문) 어려우므로 여행자분들이 오시면 달랏대학교에 가서 한국어과 학생들과 실습하며 시내 가이드도 부탁하면 일조삼석? 이 아닐까 싶다.
달랏대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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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달랏대학에서 농업선구자로서 농업기술을 가르키는 김 진국 교수
베트남 남중부 람동성 성도 달랏(Dalat) - 호치민에서 비행기로 40분 거리에 있는 해발 1500 미터의 고원도시다. 1년 평균 기온이 15~25도로 선선한 달랏는 유명한 관광지이자 베트남의 대표적 화훼 지대다. 인구 30만명의 이 도시에 ‘파파 김(金)’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한국 할아버지가 있다. 이 곳에 13년째 살고 있는 김진국(73) 교수다. 그의 명함은 2개다.
먼저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달랏대의 원예학과 석좌교수. 김 교수는 달랏 일대에서 희귀 자생란 1,155종을 찾아내 베트남 최고의 난(蘭) 연구가로 꼽힌다. 또 다른 직함은 화훼류를 생산·판매하는 ‘㈜농산’의 회장이다. 1994년 베트남 정부에 정식으로 투자 신청을 해 회사를 설립, 1만5000평의 농장에서 안개꽃 등 고소득 품종을 길러내는 유명 사업체로 성장시켰다. 이러한 명함에 앞서 김 교수는 현지 농민들에게 비닐하우스 기술을 보급, 소득을 높이는 데 기여해 현지에서 ‘농업의 대부’로 불린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베트남 산골에 들어가 호미로 바위를 깨며 땅을 일궜어. 한국에서 시간이나 때우며 내 인생을 묶어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 농장 안에 혼자 텐트를 치고 된장국을 끓여 먹으며 살았어. 아직도 할 일이 많아. 눈 감는 날까지 내 일을 할 거야.”
김 교수는 달랏대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는 한국외대·충북대·원광대 방문을 위해 달랏대 총장 일행과 지난 6월 2일 일주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한국에 오니 공기도 답답하고, 다들 더 바둥바둥 사는 걸 보니 덩달아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1년에 한두 번 한국에 온다고 한다.
김 교수는 1993년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 원예학과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63세때인 1994년 달랏으로 떠났다. 어릴 적부터 원예에 관심이 많았던 김 교수는 동아대 원예학과에 입학했고, 우장춘 박사가 운영하던 국립원예시험장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교수 퇴직 이후 외국에서 연구를 하며 남은 인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미국·호주·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연구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던 그가 베트남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일본에서 열린 난 연구세미나에서 호치민대학의 한 교수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동남아 자생란을 연구하던 김 교수는 호치민대 교수의 안내로 1993년 달랏 지역을 찾았다. 달랏는 전세계적으로 동양란과 서양란이 함께 대규모로 자생하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처음에는 연구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 곳의 가난한 농민들을 보니까 우리가 빚진 것(베트남전)을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어.”
1994년 혼자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죽기 전 무엇인가 남기고 떠나겠다’는 생각과 난·원예에 대한 애착이 전부였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교수 자격을 얻어 달랏대의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베트남 정부와 투자 협상을 하고 재산의 대부분을 털어 회사를 세웠다. 베트남 현지 직원 10명을 고용하고 달랏 산골로 들어갔다.
“달랏는 천혜의 화훼 지대였지만 현지 농민들은 좋은 조건을 살리지 못했어. 어떻게 소득을 높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내가 먼저 실천하기로 한 거지.”산을 개간해 농장을 만들었다. 바위는 호미로 직접 깼다. 1994년부터 1년 동안 농장을 조성하고 비닐하우스 3개를 세웠다. 비닐하우스의 틀은 현지에 많은 대나무로 만들었다.
베트남은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데 우기 때는 수분이 많아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김 교수는 비닐하우스를 세워 비를 가려주면 우기 때에도 꽃과 채소가 잘 자라 평상시보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후와 토양의 특성을 분석하고, 현지에서 잘 자랄 수 있는 품종을 연구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장미 12종 2만주와 안개꽃, 거베라 등을 심었다. 농장에 텐트를 치고 된장국에 밥을 해 먹으며 지냈다.
하지만 그는 현지인들의 냉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노인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의심의 눈으로 김 교수를 쳐다봤다고 한다. 농장에 필요한 물 공급을 끊는가 하면 장미 500~600주씩을 뽑아가기도 했다. 결국 장미는 포기해야 했다. 심지어 스테인리스 수저까지 없어졌다. 현지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동네에 경조사가 있으면 가장 많은 액수의 부조금을 냈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외로움은 커져 갔다. 당시 달랏에는 김 교수 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없었고(지금은 12명이있음), 베트남어를 전혀 못했던 그는 더듬더듬 영어를 하는 회사 직원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한국말을 하고 싶어 산 밑 골프장이나 호텔 주변을 서성이다 한국인을 만나 농장으로 초대하면 사람들은 초라한 그의 생활을 보자마자 떠나버렸다. 어쩌다 한국인들과 술을 마시게 되면 눈물과 함께 외로움을 쏟아냈다. 그는 “이 나이에 무슨 고생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시련은 이걸로 끝내달라’는 기도를 매일 올렸다”고 말했다.
1996년 첫 수확 후 현지인들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김 교수가 비닐하우스로 재배한 안개꽃이 10배 비싼 값으로 팔렸던 것이다. 그동안 우기에는 꽃이 나오지 않았는데 김 교수의 농장에서는 탐스러운 꽃이 많이 생산됐다. 또한 김 교수의 비닐하우스는 2모작밖에 못하던 농사를 4모작이 가능하게 했다.
하나둘씩 김 교수에게 비닐하우스 기술을 배워갔다. 현재 달랏는 비닐하우스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달랏 농민들은 부농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김 교수에게 농사를 배운 이후 수입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한국의 종자를 들여와 시험재배를 거친 후 30여 농가에 위탁재배를 하고 있다. 농민들은 ‘검증된’ 품종으로 생산량을 늘리고, 영농법을 배울 수 있어 일석이조다.
김 교수는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 새마을운동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깨닫기 시작한 거지.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정이 많은데. 어른 공경할 줄도 알고. 이제 감 열리면 감도 따오고, 배추 몇 포기도 가져와.”
텐트 생활 5년 만인 1999년 조그마한 통나무집을 지을 때에도 이웃들이 도와줬다. 김 교수는 자신의 농장에서 거둔 이익으로 매달 30여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같은 공로로 베트남 정부는 2년 전 김 교수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지난해에는 준(準) 외교관 비자를 내줬다.
그는 15만평 규모의 제2농장을 계획 중이다. 이보다 더 큰 꿈은 100만평 규모의 동양 최대 원예연구소를 세우는 일. 베트남은 물론 아시아 저개발국가에 도움이 되는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김 교수는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가 달랏 일대에서 찾은 희귀 자생란 1155종을 정리한 연구물은 베트남 정부가 유출을 우려할 정도의 큰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 기업이 거액을 제시하며 공동 사업을 제의해 오기도 했다. 달랏대학 교수 13명에게 한국의 농업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2002년에는 8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부인이 숙명여대 교수직에서 퇴직하고 베트남 생활에 합류했다. 그는 이민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절대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 교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맨 손으로 돌 깰 의지가 없으면 이민 와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생활 10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베트남어를 할 줄 모르고 앞으로도 배울 계획이 없다고 했다.
“베트남 말을 하게 되면 혹시라도 불필요한 마찰이 생길까봐 안 배워. 한국인에 대한 나쁜 감정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내 역할이 중요하겠더라고. 베트남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한국을 볼테니까.”“한 분야에서 대접받는 삶을 살면 성공한 인생 아닐까? 칠십살 늙은이도 이렇게 사는데, 젊은 ‘사오정’ ‘오륙도’ 힘 좀 냈으면 좋겠어.”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 sb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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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 한국 학술원이 달랏대학교에 세워지다
김진국 교수께서 6년여동안 베트남 문교성과 관련기관 등에 다니며 피나는노력을 한 끝에
달랏대학교내에 베트남 - 한국 학술원이 건립되고 있다
지난 11월11일에 착공식을 한바 있는 학술원은 약 1,050m2 의 바닥면적에 2층으로 세워지며 건축비용은 모두 한국인들의 성금으로 세우고 있는데 베트남 호치민 주재 한국 기업인들로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모금하고 있으며 운영도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운영되며
책임자(사무총장)를 둘 계획이다.
이 학술원 원장은 달랏대 총장(Nguyen Huu Duc) 이며 부원장은 김박사 이다.
이 학술원은 한국을 바르게 알리는 학술 활동과 베트남의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달랏대학교내의 원자력학과가 있어 그출신들이 베트남 정부의 원자력 관련부문에 약 65%로 구성 되어 있어 지한파가 많이 생겨 한국이 이 프로젝트의 중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과 이 달랏대학교 한국어과 학생들에게 질 높은 교육과 달랏 대학교 전교생(약 22,000명)에게 한국을 더 가까이 알리고 특별 활동을 통하여 양성하는 코스로 활용 하며 25만 달랏시민들에게도 영향력을 끼치는 아카데미가 되고자 설립 의 목적이 있다.
여기 건립의 성금을 보내 주신분들에게는 달랏대학교의 관인 영수증을 발행하며 기부기관이나 기부자의 이름은 동판에 새겨 학술원건물 입구에 영구히 보관하기로 하였다.
이 학술원의 기공식은 2006년 11월 11일에 달랏대학교 현장에서 거행 되었으며 수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처 건물이 완공 될 예정이라 한다.(2009. 6 예정)
- 관심을 있은 기업체와 기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고대 하고 있다 .
**모금은행
신한은행 호치민지점(USD구좌) 750-900-087001 (Dalat University Academy Center)
베트남- 한국 학술원 조감도
달랏에서 김진국박사님과 함께 필자 달랏대 부총장, 총장, 김진국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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